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빛나는 가을의 아름다운 승리자

먼 숲 2007. 1. 26. 07:32

 

 

 

 

 


태풍이 두 차례씩이나 진저릴 치면서 지나간 들녘은 또 다시 고요와 평화로움 속에 누룻누룻한 황금벌판으로 물들어가고, 들어붓는 폭우를 퍼붓던 하늘도 푸르른 하늘이 되어 가을을 향한 길을 내고 있다. 아침바람이 선선한 요즈음 여기저기 가릴 곳 없이 쓰러지고 찢겨지고 망가진 여름 흔적을 외면하면 들녘은 한차례 꿈을 꾸고 난 뒤의 새아침처럼 천연덕스럽게 맑고 밝은 가을날의 풍경이다. 가을의 서정이 물씬 묻어나 난 날마다 단풍처럼 물들어간다.


깊어 가는 가을 속에 시끄러운 것은 항상 바깥이 아니고 속세간이다. 쓰러져 상처 나고 망가진 태풍의 외상과 바람으로 멍든 자연의 타박상은 저 선선한 가을바람과 햇살이 어루만져 주어 어느새 화농으로 번진 상처가 꾸둑꾸둑하니 아물고 딱지가 져서 말끔히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 잘라지고 부러져 골절상을 입은 것들은 내년이면 새 가지가 움트고 새 잎이 돋아 더 튼실하고 단단한 생명의 나이테를 그릴 것이다. 그러나 구겨진 세월 속에서 늘 요지경처럼 변화무쌍한 세상사는 점점 곪고 늘 꼬이고 터지고 점점 암세포처럼 자라 그 치유의 뿌리를 찾을 수 없는 것 같다. 날마다 혹처럼 자라서 나도 모르게 숨통을 조이며 숨이 턱 막히게 한다.


치솟는 유가와 추락하는 주가는 병약한 소시민의 가슴을 철렁철렁 내려앉게 하며 절망의 벼랑으로 내 몰고, 누구 하나 믿지 못하는 정치의 불신과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와 그 추한 꼬릴 숨기느라 다시 반복하는 부정의 악순환이 만연해 더 이상 나라 살림살이에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환자를 고치는 병원과 약국이 밥그릇 싸움에 긴 싸움의 연속으로 곪아 가고 치료가 아닌 진통제의 항생제만 먹어 이젠 싸움의 면역성마저 두꺼워 해결의 길은 요원하다. 정치판의 환자야 이미 제 처 놓은 중증환자라 쳐도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도 저 모양이니 이 병든 세상의 병을 고치는 진정한 의사는 누구인지 가끔은 세상이 원망스럽다.


신문의 경제면을 멀리서 봐도 "몰락", "침몰", "위험순위"등 큰 활자들이 이미 IMF의 태풍이 지난 지금에도 심한 풍랑을 만난 듯 비관적인 암담함에 휘청거린다. 제목만 봐도 가슴이 막막해 아예 경제면을 외면한지 오래다. 볼수록 답답하고 부아가 끓어 소화불량처럼 속이 더부룩해진다. 어느 것 하나 시원히 해결되는 것 없이 깨진 독의 물 붓기 식의 헛손질과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척 하는 탁상공론의 반복이다. 이젠 큰 소리에도 모두 사오정처럼 딴소리만 하고 저마다 모르는 척 남이 되어 간다. 이 척박한 세상사가 역사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니 인생이 삭막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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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밖을 나서면 한결 기분이 새로워진다. 편두통처럼 오는 세상사의 아픔도 눈 들어 가을의 햇살과 바람의 향기를 맡으면 그 청량함이 가슴에 신선한 호흡을 하게 한다. 눈부시지 않은 햇살의 농도에서 곡식이 익어 가는 무게가 느껴지고 들녘을 건너 온 바람의 냄새가 과일향기로 단내를 풍긴다. 지금쯤 과수원 길을 따라 나서면 그 과일의 향이 입에 고여 머리가 맑아질 것이다. 어떠한 자연의 재해와 변화를 겪고도 가을은 약속처럼 남겨진 열매들의 결실을 위해 바쁜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이 가을 이런 분주한 땀흘림으로 영광스런 결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요즘은 잠시 세상의 시름을 잊은 채 그들의 승전고에 울고 웃는 감동의 드라마를 본다. 올림픽 소식이 그 어떤 소식보단 반가운 기별을 가지고 아침을 눈부시게 하고 있다. 꼭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노력과 의지로 일궈낸 열매의 아름다움과 어린 선수들과 노장의 재도전의 투지로 메달을 따낸 힘든 승리의 이야기에 눈물을 찍어내게 한다. 그들의 땀이 희망이 되어 감동적인 눈물방울을 만들며 우리들 마음 마음마다 가슴에 진주 같은 메달을 걸어주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올림픽 소식을 보며 그들이 일궈 낸 메달의 진가가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피땀어린 결과라 생각할 때 우린 얼마나 쉽게 생각하고 편하게 딸 수 있는 열매를 기다리는지 반성하게 한다. 좌절과 패배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서 세계의 한 복판에 서는 올림픽경기 승리자의 아름다움이 이 가을 금빛 햇살처럼 눈부시다. 또한 그 자랑스런 올림픽 승리자 외에도 박찬호가 연이은 승전보를 울려 온 국민의 기쁨을 배가하고 있다. 나는 우연히 그의 인터뷰 내용과 편지를 보고 박찬호의 순수한 인간적 매력에 다시 한번 그가 아름다운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에 대한 설명은 할 필요조차 없이 모두가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임에 그를 거론하는 것조차 싱거운지도 모른다. 난 박찬호란 사람의 외형과 명성만을 대충 아는 평범한 상식 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15승을 달성한 후 그가 신문사에 보낸 편지를 읽고 감동되어 역시 세계적 스타구나 하면서 그의 편지를 다른 칼럼란에 인용했었다. 그리고 며칠 전 16승 고지를 오른 후 그의 일문일답이 참으로 겸손하고 소박해서 그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에 다시 감동해 가슴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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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운 소감은.
"기쁘다. 오늘 승리를 태풍으로 농사가 잘 안 돼 안타까워하시는 공주에 계신 아버님께 바친다."
- 앞으로 두경기가 남았는데 목표는.
"언제나 그렇듯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것이다. 다른 욕심은 없다. 오늘 승리도 케빈 브라운의 투구를 보고 많이 배운 덕분이다."


9.21일자 중앙일보 신문에 실린 그의 겸손하고 진실한 대답이다. 세계의 우상이고 우리나라의 자존심이고 자랑인 그의 모습이 푸른 나무처럼 싱그러워 보였다. 백만장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 개인시즌 최다승의 기쁨을 비바람에 쓰러져 썩어 가는 나락과 그것을 안타까워하는 아버님에게 전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은 우리나라의 모든 농부에게 전해주는 사랑의 메세지라 생각한다. 어마어마한 미국이란 나라에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농부의 마음으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욕심보단 최선을 다하는 초심의 미덕을 아는 멋진 사나이의 그가 그런 승리자가 된 것은 그만한 노력과 좌절과 패배를 이긴 결실이라 생각한다. 열심히 일하고 땀흘리며 욕심 없이 사랑으로 농사짓는 농부의 지혜를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그는 17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고 아시아의 빛나는 별이 되었다. 최고라는 고독한 고지에 오른 그는 이미 내리막길도 아는 성실한 젊은이라서 변함 없이 열심히 노력하리라 생각한다. 항상 초심으로 하나 하나의 공을 모두 중요시하는 그의 마음이 가을의 복판에 선 사과나무의 열매들처럼 알알이 박혀 금빛으로 빛난다. 진정 승리자의 모습은 일확천금을 쉽게 꿈꾸는 요즘의 헛된 꿈이 아닌 눈물로 일궈낸 보석일 때 영원할 것이다. 책임감 없이 시류에 편승하고 일관성은 버리고 수시로 모양과 말을 바꾸는 행동과 결정을 하고도 승리자처럼 거들먹거리는 썩은 양심이 우글대는 이 시대의 흐름에서 많은 노력과 땀방울로 경쟁을 당당히 물리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아름다운 승리자의 모습이 이 가을 더욱 알찬 감동으로 느껴진다.


지금 난 비록 많은 삶의 문제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산재해 있다 해도 그 집착에서 벗어나 보고 싶다. 빠져나간 빈자리는 반드시 새로운 무엇이 다시 채워진다. 마음에 쌓인 미결의 문제를 이 가을엔 밖에 드러내놓고 부드러운 햇살과 바람으로 말려 보자. 눅눅하고 곰팡이 슬어 썩어가던 것들도 모두 가을햇살에 널어 말려 버릴 것은 버리고 상처 난 것은 치료하고 힘든 것은 다른 시각과 이해로 새로운 처방전을 생각해 볼 시점인 것 같다.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듯 이 가라앉은 세상사에도 날마다 밝은 빛처럼 새로운 감동과 반가운 소식도 있으니 살만하지 않은가. 모두 금메달을 딸 수는 없고 모두가 박찬호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정직한 노력과 보석 같은 땀방울에 우리 모두 박수 쳐주며 기뻐하며 뜨거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가을바람이 쪽빛하늘처럼 푸르다. 나는 오늘 박찬호의 파란색 야구모자를 쓰고 가을의 들녘을 걷고 싶다. 마음에 쌓인 것 다 털어 내고 마음에 때 낀 것 다 씻어내며 그의 멋진 포즈처럼 주먹 불끈 쥐고 포효하고 싶다. 그의 파란 모자가 나를 젊게 한다. 그리고 인생의 빛나는 메달을 향해 여름을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 온 모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가을향기 그윽한 국화꽃다발을 안겨 주고 싶다.



2000. 9. 26. 紫雲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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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