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 2007. 1. 26. 07:22

 

 

 

 

 

 

싱그러운 오월은 진초록 물감을 풀어내며 여름의 숲속으로 사라져 갔다
벌써 유월의 초입은 더워지기 시작한다. 이른 바 初夏다.
한낮은 온도계가 삼십도에 가까와지고 있지만
아직은 뙤약볕이 아니어서 오후의 햇살과 그늘이 음양의 조화처럼 서늘하다
산섶은 서럽게 핀 하얀 찔레꽃으로 유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마다 솜털 달린 열매들이 제 모양을 만들고 있다
청매실이 푸르게 풋내나는 몸을 숨기며 주렁주렁 열렸고
버찌가 자줏빛으로 익어가는 벚나무 주위엔 길을 오가던 길손들이 맴돈다
뉘 집 마당가의 복숭아 나무를 지나치자니
벌레들에게 저절로 솎아진 개복숭아들이 툭툭 떨어져 있었고
밭머리에 앉으니 산그늘이 길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아카시아꽃이 지자 깊어진 숲속에선 밤꽃이 피기 시작한다
짝짓기에 여념이 없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청명하다
난 새들이 도시화 된 내 주변을 모두 떠났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숲 사이를 오가며 고운 소리로 울고 있었다
새가 떠난 게 아니라 우리가 도시 속으로 들어가 새를 잊고 있었다.

샛노란 날개를 파닥이던 꾀꼬리가 숨박꼭질을 하며 노래하고
휘파람새도 규칙적인 간격으로 울어대며 짝을 부른다
뻐꾸기도 먼 숲 속에서 산메아리처럼 울어대고 있었다
이렇게 맑고 아름다운 새소리를 사람들이 삶이란 이유로
자연 속에서 멀어져 가거나 무감각하게 등지고 살고
분주하게 일터를 오가며 소음에만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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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랜만에 하루 휴가의 틈을 이용해 밭일을 거들어 본다
오월의 사잇길을 지나며 대지의 어느 자락이든 푸르러져 맨 땅이 없다
하늘과 마주한 땅이라는 공간은 빈 틈 없이 생명이란 존재를 뿌리내리며
왕성한 성장력으로 여름을 키워내고 있었다.
간간히 불어가는 바람속에서 나무냄새와 풀냄새가 난다

농사는 이미 고되기만 하고 소득에서 버림받은
가장 원시적인 중노동이 되었지만
어쩌면 가장 靜적인 동시에 動적인 노동인것 같다
평생 농사를 지신 팔십의 노모가 흙과 일하실 적엔
무심해진 수도승처럼 홀로 일에만 빠져 계셨다
싹을 틔운 새싹들과 대화하듯 그 많은 농작물만 애지중지 하셨다
어쩌면 씨앗이란 생명체를 가장 믿고 계신 것 같았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는 여러가지 종류의 농작물들이
여기저기 밭고랑마다 뿌릴 뻗고 자란다
아직은 어린 탓에 더러 솎아 줄 것이 많아 촘촘한 곳에선 뽑아내고
빈 자린 기워 주며 저마다 제 자릴 만들어 주시고 계신다
소복하게 자란 참깨와 조를 솎아주고 밭 가장이엔 들깨와 콩모를 내셨다
그리고 비 맛을 본 잡초들이 치솟아 오르기 전에
부지런히 김을 매시며 어린 싹들은 두둑하게 북을 주셨다.

오이와 참외,호박과 고구마 같은 덩굴식물은 새 순을 벋어가고 있고
이웃 밭엔 봄무가 알이 들어가며 허옇게 도톰한 종아릴 내보이고 있다
봄무는 달지도 않고 메워서 그냥 먹으면 속이 쓰리다.
그래도 저 봄무로 빨갛게 햇깍두길 해 먹으면 개운할거라 생각하니 군침이 돈다
그 이웃 아저씨가 얼갈이 배추가 실하게 자라 한아름 뽑아 주신다
아직도 농사꾼은 그렇게 오가는 정으로 경계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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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성귀는 젊음이 짧아 며칠 새로 억세진다.
사나흘 가문 사이 텃밭의 상추와 쑥갓이 오갈병이 들고 있었다
푸성귀도 하우스 속에서 물만 먹고 자라면 연하고 부드럽지만
본래 채소의 고소하고 풋풋한 맛, 그리고 쓴맛과 단맛이 적다
노지에서 바람과 햇볕을 받은 푸성귀가 억세기는 하지만
싱싱한 야채의 맛과 영양가를 느낄 수 있다
여름은 그 풍성한 야채의 식욕으로 날 살찌게 한다.


사는 건 길들여지는 거라고 난 젊은 날 도시를 꿈꾸면서도
시골의 순박한 정서와 자연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 중 쉽게 변치 않는 습성들이 먹거리의 맛과 흙에 대한 향수다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를 살면서도 이러한 습성을 버린다 생각하면
마음이 삭막하고 살아 온 세월이 쓸쓸해진다
농사를 靜적인 노동이라 말했지만 그건 내 생업의 영역을 벗어나
단순히 목가적인 여유에서 오는 감상일지도 모른다.
언제나 지금의 내자리에서 건너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름답고
내가 앉아 있는 마음자린 피곤하고 아파 보였다.

얼마큼을 살아야 순간순간을 감사하며 내 삶의 자리에서 편안해질까
얼마만큼 버려야 저 산야의 초록처럼 깊어지고 마음자리가 평화스러워질까
가끔 오늘처럼 밭둑에 앉아 풀향기에 젖으면 난
숨가쁘게 돌아가는 변화의 굴레에 길들여지지 못하고
아직도 이탈된 궤도를 거슬러 오르는 외로운 그림자를 본다
평생을 숙명처럼 일에 매달려 사시는 노모는 인생을 어떻게 얘기하실까
이제는 그 이유를 어렴풋 알듯하면서도 겉으론 부정하고 싶다.

하오의 따가운 햇볕에 푸성귀들이 축 쳐져가고 있다
하품나게 늘어진 마음자락을 이끌고 산그늘 속으로 들어가 본다
방심한 채 산을 내려오던 장끼가 놀라 푸드덕 날아 오른다
꿩! 꿩 하며 놀란 소리가 유월을 깨운다.


2003.5.27일 추억의 오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