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 봄날은 간다 』
봄 가뭄이 심해 건조해진 대기지만 꽃이 피고지는 순리를 막을 수 있을까. 낙화의 꽃그늘 아래엔 자잔한 들꽃의 향연이 숨가쁘다. 잘 다듬어진 잔디의 구릉위로 작은 꽃무리가 속살거린다. 별꽃같은 봄맞이꽃부터 꽃마리, 냉이, 꽃다지, 제비꽃, 민들레가 넓게 터를 잡고 봄을 얘기하는 자잘한 문자처럼 피어 있어 조심스레 그들의 노랠 들어 준다. 이미 먼 봄산은 산벚꽃의 마른 버즘이 가시고 유록의 숲으로 번져가고 있다. 참 아름다운 계절이구나 하는 마음의 심호흡을 하며 자전거 패달에 힘을 준다. 신도시의 변두리를 둘러친 공원길이 상춘객으로 한가롭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가족들의 걸음마도 즐겁고 크고 작은 애완견과 같이 산보하는 새로운 풍습이 내겐 아직 거슬리기도 하다. 군데군데 자릴 펴고 앉아 한가로이 봄볕을 쏘이는 오후의 한 쪽엔 비지땀을 흘리며 조깅을 하는 발걸음이 활기차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는 부모의 웃음이 환하고 태동을 느끼는 산모의 부른 배를 부축하며 걷는 새신랑들의 보폭이 조심스럽다.
해마다 오는 봄이건만 반갑고 새롭다. 내가 언제부터 봄을 좋아했던가. 그 자연스런 변화도 나이탓일까. 젊은날엔 봄이 싫었다. 어쩌면 감당치 못할 방랑의 생각과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현실사이에서 꽃구름처럼 피어나던 꿈과 그리움이 봄이되면 아픈 편린의 순간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일거다. 변하고 싶은 욕망이 새로 움트고 꽃 피는 계절에 어찌 피 끓치 않았겠는가. 그 봄이 참 많이도 흘러갔다. 이제 내게 돌아 올 봄을 아이들에게 돌려 준다. 자고나면 푸르러지는 산빛처럼 아이들이 변하고 비 온 후에 돌아 본 나무처럼 아이들은 커간다. 나는 작아지기보단 늙어간다. 그게 지금 솔직한 표현이다. 속으로 묻어두는 근심도 많고 외면하는 걱정도 많다. 싫은 것 싫다 할 용기보다 어쩔 수 없이 해야지 하는 나를 위한 위안으로 대충 넘기는 체념이 먼저고, 그렇게 삭히려고 애 쓴다. 하여도 부끄럽지 않고 나를 버릴 수 있는 속됨도 용서하고 산다. 그래서인가 설레이지 않은 채로 봄이 아름답다.
먼지나던 추억의 길을 달려 지금은 그림같은 공원길을 달린다. 인도엔 발 표시가 있고 자전거 도로엔 자전거가 서 있다. 오고 감의 선이 명확하게 분할된 아스팔트 길을 이젠 낯설지 않게 달린다. 화사한 파스텔빛 꽃길을 지나 신도시를 들어서는 큰 다리밑을 지나고 있다. 칠순이 넘은 듯한 노인 서너명이 그늘진 다리 아래서 쉬고 있었다. 한 노인이 노안의 주름만큼이나 주름진 아코디언을 구성지게 연주하고 있다. 당신의 거친 숨소리처럼 손풍금은 쉰소릴 내지만 바람을 불어넣은 손길은 흥에 젖어 있었다. 흘러간 노래가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구성지다. 그래 무슨 서운함이 있는가. 가는 봄은 보내고 나는 또 노래하면 된다. 꽃잎이 진들 내 인생도 그리 꽃처럼 떠날텐데 서러워할 일 있는가. 그들의 응달이 아름답다. 꽃그늘에서 아코디언을 켜는 그들의 노래가 섧지 않다. 어느 새 나도 노래한다. 앞서 가는 자전거를 따라가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봄날은 간다. 초록이 오는 사이, 꽃이 지는 사이 봄날은 간다.
2004.2.20. 먼 숲
<사진 변희섭 : 포토 조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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