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봄을 찾는 여행

먼 숲 2007. 1. 26. 07:17

 

 

 

 

해마다 해빙기면 떠나고픈 설레임으로 방랑의 움이 튼다. 짧은 이월의 끝에 서면 두껍게 얼었던 강의 얼음장 밑으로 새봄의 맥박이 흐르듯 내 가슴 속에도 긴 겨울동안 동면해 있던 의식들이 깨어나 속 뜰 가득히 뜨거운 봄의 숨결로 훈훈해진다. 이럴 땐 성가시게 굴던 추위도 구질구질했던 마음도 벗어 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남으로서 새로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겨울 내내 찬바람에 웅크리며 여위어간 가슴속에 꿈틀대는 생의 활력소를 채우기 위해 삼월이 시작되면 제부도가 있는 서해 바닷가 남양반도 끄트머리인 송교리로 떠난다. 송교리엔 갯바위처럼 순박하고 좋은 친구가 있고 아지랑이처럼 파도에 밀려오는 봄을 바라볼 수 있는 바다가 있어 좋다. 그리고 늘 따사롭고 정겨운 모습으로 날 맞이하는 섬, 제부도가 있어 이곳을 찾을 때마다 고향을 찾는 것 같은 평온함으로 가라앉는다.

 

송교리는 수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시간 반 쯤 가는 거리인데 예전엔 비포장 도로였으나 지금은 반쯤 포장이 되어 꼬불꼬불 먼지 길을 버스로 터덜거리며 달리던 옛스런 사색의 멋은 시들었지만, 때묻지 않은 전원 풍경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어 차창에 눈을 두고 가면 정겹기만 하다. 낭만적인 시골의 서정도 콘크리트 문명에 훼손되어 가는 요즘이지만 외진 변두리로 가는 이 길에서는 아련한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추억을 돌아다보며 서쪽으로 달리면 시외버스 종착역인 서신에서 멎고 송교리는 서신에서 시오리길 되는 바닷가 끝이다.

 

 

 


 

 

 


나는 서신에 내려서부터는 탈 것을 마다하고 걸어서 간다. 아직 쌀쌀한 해풍을 안고 걸으면 비릿하고 짭쪼름한 바다냄새가 싱싱하고 멀리 그림처럼 떠있는 작은 섬인 제부도가 날 반긴다. 수평선에 떠있는 제부도는 바라다만 봐도 귓가엔 벌써 파도소리가 출렁거려 요한스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 같은 가벼운 발걸음이 된다. 송교리의 지름길은 염전길인데 염전길은 바둑판처럼 나란하고 수로마다 겨울동안 내버려진 물레방아와 드문드문 소금창고가 있어 안개가 끼는 아침은 이국적인 풍경의 수채화다.

소금버캐가 버석거리는 염전 길을 가로질러 마을 뒷산에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나타나 겨울동안 얼었던 마음도 해빙을 맞아 탁 트여 오고 아득히 수평선엔 봄 햇살을 받은 파도가 은어의 비늘처럼 반짝거리며 곱다. 송교리 앞바다엔 제부도와 누에섬이 떠 있는데 제부도는 썰물 때는 바다 한가운데를 걸어 들어가는 길이 생겼다가 밀물 때면 다시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이 되어 모세의 <홍해의 기적>같은 느낌을 준다. 관광지처럼 아름다운 섬도 아닌 낯설은 섬이지만 그리운 친구가 사는 바닷가라선지 늘 내 마음의 바다에 떠 있는 섬이다. 산 아래는 미루나무가 듬성듬성한 아름다운 마을이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고 해안선을 따라선 바다의 속살을 드러낸 갯벌이 누워있다. 여기가 내 친구가 살고 가끔은 구름처럼 떠돌던 내 마음이 와서 사는 바닷가다.

 

 

 

 

 

 

쉼 없이 직장을 오가며 팍팍한 인심 속에 메말라 가는 감정을 안고 사노라면 이 도심의 부대낌에서 벗어난 물소리 바람소리에 마음을 씻고 싶은 때가 더러 있다.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상반된 또 다른 피안의 세계를 원하면서 피곤한 마음을 쉬고 싶어할 것이다. 그때는 마음의 창을 열어 새로운 변화로 생활의 리듬을 가져야 그것이 살아가는 힘이 되고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 될 수 있으리라. 살아온 세월 깊이 쌓인 먼지를 털고 젊고 슬기로운 뜻으로 태어나는 이런 여유야말로 상처받아 삐걱대며 돌아가는 생활의 톱니바퀴에 부드러운 윤활유를 쳐주는 격이리라.

나도 마음의 계절을 맞아 물기 오른 새잎으로 돋아나고 싶은 마음일 땐 호젓하게 송교리로 향한다. 욕심으로 눈앞이 어두워질 때면 바다처럼 순수한 송교리 친구가 그리워지곤 한다. 그 친구는 남들은 다 대처에 나가 살지만 혼자 염전 일을 돌보며 묵묵히 농사를 지으며 욕심 없이 착한 마음으로 산다. 그 친구라고 어촌에 묻혀 외지게 살면서 어찌 답답하고 떠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항상 그 격정을 씻어내며 순박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난 그 친구의 겸손하고 훈훈한 인정 속에 소주잔을 나누며 기쁨을 건네고 근심과 욕심을 삭혀 가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갈대가 무성한 갯둑 길을 둘이 거닐면서 그럭저럭 사는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위로하며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힘을 북돋아 준다. 밤이 되면 송교리의 밤바다는 침묵, 그 순수이다. 머얼리 제부도도 꿈에 잠겨 잠자는 밤이면 나는 조용히 귀 기울여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밤바다의 적막 속에서 추억을 건져 올린다. 살면서 늘어나는 욕심 때문에 늘 목말라 허덕이는 마음을 비우고 새로이 꽃피는 봄의 소리를 배우면서 또 다시 웃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의 바다를 만든다. 그리곤 침묵의 바다에서 내 마음의 메아릴 듣는다.

 


 

 

          1985년 삼월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