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디어 일년간의 전쟁은 십일월로 들어서자 겨울이라는 계절앞에서 긴 휴전을 선포하고 종전에 들어갔다. 한 생을 위해 꿈과 열정으로 아우성치던 이 피할 수 없는 지난한 삶의 전쟁은 해마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한 접전으로 싸우면서 기나긴 세월 속, 역사의 한 페이지로 저물어 갔다
봄을 지나서부터 초록의 城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하고 기세등등하게 야전의 신록과 숲을 이루며 녹색의 城 안을 염탐조차 못하게 무성한 철조망과 혈기왕성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사열을 이루어 城 안을 들어서려면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었다 그러한 철옹성이 얼마전부터 먼 북쪽의 성이 붉게 불타면서 전방의 산자락을 내주더니 그 산맥을 따라 침입한 적군에게 한반도의 모든 아름다운 요새가 함락되어 갔다
특히 여름날 태풍이 지나간 지역이나 푸르름으로 기세좋게 번지던 야전의 들판과 단풍이 화염처럼 휩쓸고 지나는 7부능선까지의 산자락에선 전쟁의 상흔은 처참한 몰골만 남기고 떠나는 가을 뒤에서 피폐해지고 망가져 버렸다 일부 풍광이 좋은 전략적 요충지나 유흥지는 시대의 흥망을 읽을만큼 썰렁하고 참담했다.
포성과 화염이 사라진 대지의 전쟁터는 죽음처럼 고요와 적막감이 몰려와 평화로워 보였다 간간히 부서지고 망가진 잔해 사이에서 동면에 들지 못한 살아 숨쉬는 생명체들이 부스럭거리거나 앙상한 나목과 잔가지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스치기도 하고 아직 꺼지지 않은 포연처럼 자욱하게 수시로 새벽이면 무서리와 산안개가 출몰하여 숲과 벌판은 아무일 없듯이 전쟁의 흔적조차 은밀하게 감추기도 하였다.

더 이상 풍부한 보급로와 따듯한 남쪽의 지원군이 끊기고 북풍이 불때마다 먼 전선에서 퇴각하지 못한 패잔병의 신음소리가 간간히 바람을 타고 웅웅거리며 들려오고 있지만 그마져 십이월이 지나면 통신마져 두절된다는 소식이다 전열을 북돋우며 대오를 지어 위풍당당하게 행군하던 가로수 길도 텅 빈 채 더이상 힘찬 진군가는 들려오지 않는다.
추적추적 가을비를 맞아가며 마지막까지 투항하던 전사들도
대부분 꽃같은 낙엽을 휘날리며 죽어가고 나머진 겨울이라는 복병 앞에서 항복하거나 쓸쓸히 패잔병이 되어 겨울의 포로가 되었고 거역할 수 없는 세월 앞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난 삶이라는 무거운 포탄을 옮기다 그 무게에 눌려 늑골을 다치고 가끔 스트레스라는 수류탄이 예고도 없이 터져 가슴에 구멍이 난 채 여기저기 울혈처럼 남은 상처를 안고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곧 내 죄상을 물어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감상방임죄나 사랑절도죄 같은 죄목으로 밝혀져 그나마 끈끈하게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살아 남고 싶었다 남루하지만 내 가족을 위해선 그렇게나마 미천한 목숨을 구하고 짧으나마 남은 생을 열심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차라리 치열한 삶의 계절에서 미련없이 떠나간 헤아릴 수 없는 낙엽의 이별처럼 뒤를 이어 그렇게 깨끗하게 요절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난 아직 영생을 믿지도 못하고 이승이 어딘지 짐작만 할 뿐 오만하고 어리석은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곧 썩어 없어질 육신을 안고 먼 길을 가야만 했다 이렇게 미련한 생이 자연에 세 들어 사는 인간과 욕심없이 순응하는 대자연의 순리와의 차이인 것 같았다
우린 젊은날의 아름다운 청춘과 미련 때문에 때론 연극배우처럼 이 삶의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화약냄새 나는 포연이 가신 내 사유의 뜨락엔 어느 한 때 꽃처럼 피었던 포탄의 흔적으로 메꿀 수 없는 영혼의 깊은 웅덩이가 패이고 내 작은 정원은 여름내내 피고 지던 꽃과 나무가 시름없이 시들어 갔다.
난 이제 지난 계절의 화려함과 풍성함을 버리고 아픈 상처를 이끌고 동토의 땅으로 포로가 되어 떠난다 그 곳은 폭설과 흰 자작나무숲이 있는 먼 시베리아 벌판으로 아우슈비치 수용소 근처의 귀양지일거라 했다 고독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유배지에서 긴 겨울을 지나 허리께까지 쌓인 눈이 녹을 때까지
뻬치카의 불빛속에서 외로운 이리들의 울움소릴 들으며 결빙된 마음의 호수가 녹는 날까지 내 죄목을 반성하며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야 할 것이다.
봄이 되면 다시 생의 아름다운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 강물과 숨죽이며 내통하던 척후병들은 소리도 없이 새로운 전쟁을 선포할 것이고 새들은 부산한 전령사가 되어 부지런히 최전선에서 들려오는 숨가쁜 새 생명의 멧세지를 전쟁터에 전할 것이다 겨울내 땅속에 은거하며 다음 전쟁을 준비하던 생명의 전사들은 온 몸에 연두빛 화살과 꽃분홍 총탄으로 무장하여 일제히 푸른 대지를 향해 향기로운 포문을 열 것이다.
또 다시 설레이는 푸른 대지의 전쟁을 위해 나도 기운을 차려 전열을 가다듬고 전선에 뛰어들 채비를 해야 한다 소진된 에너지를 비축하고 내가 대적 할 미워할 수 없는 적군을 상세하게 파악하여 그의 이미지를 기억하고 해빙이 오면 긴 겨울의 포로에서 해방되어 치열한 싸움터에서 낙오되지 않게 싸우리라 잔인한 사월의 전투에서는 수많은 포탄과 화살을 맞고
낙화가 시작되는 화사한 날 장렬히 전사하여도 좋으리라 살아있는 모든 사랑스런 생명들과 살아가면서...
2003.11.15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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