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은 강을 따라 흐르고 물길은 첩첩산중을 가르며 안으로 안으로 숨겨진 골짜기를 파고든다
좀체로 가슴을 내어주지 않는 산들이 헤집고 거슬러 오르는 물길에 쓸려 낙엽송 진을 친 막다른 산섶에선 골골히 패인 적막한 가슴이 쓸쓸해 두꺼운 산안개 감싸안고 있었다
굽이굽이 산모퉁이를 돌 때마다 어렴풋 드러나는 먼 기억의 속살이 푸르다.
산비탈을 따라 이어진 옥수수밭과 접시꽃 환하게 핀 산골마을 오두막 수직의 벼랑에 선 울울창창한 잣나무와 산그림자 건너는 계곡의 청청한 물소리
강원도를 지나는 길은 늘 이런 풍경의 익숙함이 깊은 내면의 오솔길에서 내 발길 잡으며 오래 비워 둔 내 고향집 같았다
어린 날 미지로 떠남의 시작점이 이 아득한 미시령을 넘는 여행길이였다 뒤돌아보면 현기증을 느끼는 고갯길이 내 삶의 여정인줄도 모르고 그 때는 구름처럼 넘었다
내려다 보면 무서움으로 오금이 저렸던 山頂을 넘으면 신세계가 존재할거란 그리움을 동해의 높은 파도가 지워버린지 오래건만 그 안개속의 꿈을 아직 버리지 못했다

이제 주름진 어른이 되어 운무속의 고갤 넘는다
둘러봐도 기억나지 않는 낯설음이 슬프다 그보다 가슴을 가로막고 있던 산맥을 넘고서도 개이지 않는 세월의 막막함이 더 허허롭다
바라봐야 수평선인 생의 한계점에 여직 무슨 허황된 욕심을 부여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아직도 저 굽은 고갯길처럼 어질한 질곡의 날들이 용트림처럼 들끓는다 바닷가의 비린내를 등지고 넘는 고갯길은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현세(現世)처럼 안개속이다
낭떠러지를 더듬대고 가는 발길이 아슬아슬한데 어둠처럼 깊은 산은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삶이 이처럼 무심하고 냉정할진데 나는 늘 허방한 세상에서 감상처럼 한탄했단 말인가
허위허위 고갯길을 돌아나와 바람과 마주하니 지나 온 길마져 지운 망망한 운해속이다 그렇지, 지나 온 세월마져 저 운해속에 버려야지 다시 산의 정수리를 넘으면 길은 이어진다 길은 강을 따라 흐르고 삶은 세월을 따라 흐르리라 뒤돌아 선 발길에 파도처럼 산안개가 밀려온다
2003.8.10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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