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녹색 미각(味覺)의 여름

먼 숲 2007. 1. 26.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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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복을 넘긴 칠월은 습하고 더운 기운이 훅훅 땅에서부터 솟아 오르고 오락가락하는 장마비로 대지는 축축히 젖어 있었다. 오랜만에 찾은 밭두렁은 무성하게 자란 풀섶으로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면 쥐들의 소굴이 되어 옆에 있는 콩밭과 옥수수밭이 남아 날 것 같지 않아 오랜만에 밭둑을 깎기로 했다. 예전엔 한여름 내내 하던 일이지만 이젠 일년에 한두번 풀냄새 물씬 풍기는 낫질을 한다. 마치 봉두난발을 한 머릴 가지런한 스포츠 머리로 이발하는 것처럼 풀을 베고 난 둑은 단정하고 산뜻해 보였다. 무엇보다 풀을 깎을적마다 풍겨오는 풀향기는 라벤더나 로즈마리같은 허브향보다 더 강하고 진하다. 그 풀향기가 마음에 녹즙처럼 스며든다. 풀을 깎다보면 습한 열기로 등허리가 풍덩 땀으로 젖고 어느새 손끝은 초록빛 풀물이 들지만 마음은 개운하고 시원했다.

잠시 땀을 식히며 밭둑에 앉으니 잠자리들의 군무가 한가롭다. 서늘한 산그늘에 앉아 잠자리의 원무를 보니 그렇게 잠자리처럼 가벼워졌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잠자리의 가벼운 비상을 따라가며 오래 전 꿈꾸던 예이츠 시의 이니스프릴 생각했다. 여름이 깊어지면 항상 이니스프리 호숫가의 잔물결이 머리속에서 찰랑거리고 이명처럼 잉잉대는 벌소리를 들었다. 이 어지러운 현실속에서 난 아직도 그 이니스프리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산섶엔 청청한 풀벌레 소리가 산그늘처럼 서늘하다. 하오의 열기는 점점 축 늘어지지만 날이 흐려선지 기세좋은 작물들은 여전히 푸르름이 치솟고 있다. 밭고랑에 들어서니 싱싱한 푸성귀로 가득하다. 내가 입맛 다시는 초록의 미각은 저 여름의 녹색식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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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밭둑을 빙둘러 울타리처럼 번지는 성장력의 일등공신은 호박이다. 빈 틈없이 뻗은 호박순은 내가 가장 즐겨먹는 복쌈이다. 양파나 풋고추를 송송 썰어 끓인 된장을 부드럽게 데친 호박쌈에 얹어 먹는 호박잎은 참 토속적이고 구수하다. 무섭게 자란 호박넝쿨사이에 윤기나는 애호박이 제법 있다. 궂은 날 저 애호박과 풋고추를 굵게 썰어 부친 밀전병의 맛을 기억해 낸다. 그 옆엔 오이덩굴이 낮은 숲을 이루었다.지주를 세우지 않고 평지에 벋은 오이덩굴에서 푸른 청오이를 찾으려면 긴 막대기로 지뢰찾듯 더듬거려야 한다. 벌써 덩굴 사이엔 누런 노각들이 커진 몸을 눕히고 늙어간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시간에 오리가 넘는 길을 뛰어 와 바삐 찬밥을 먹고 가려면 텃밭에 있는 애오이 몇개 따다 고추장에 찍어 먹는 게 가장 편한 반찬거리였다. 그렇게 찬물에 말아 먹은 밥은 다시 학교에 가면 다 내려 갔다. 그 풋오이같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나도 저 노각처럼 피부도 거칠어지고 늙어간다. 하지만 늙은 오이는 그 나름대로 맛이 다르다. 시큼해진 노각의 두툼한 살을 저며 가늘게 채 썰어 살짝 절였다가 고추장에 무쳐 보리밥과 함께 커단 양푼에 비벼 먹던 풍성한 맛은 한여름의 별미중의 하나였다. 노각은 나이값을 하는지 그렇게 여럿이 나눠 먹어야 제 맛이 났다.유난히 오이농사를 많이 짓던 내륙이라 아작아작 씹히는 개운한 오이지에 새콤하고 담백한 오이깍두기까지 오이는 말 그대로 여름의 비타민씨였다.

오이밭 고랑을 옆으로 참외를 심었는데 참외는 벌써 수명이 다해 누렇게 잎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서 딴 참외는 빛깔은 꾀꼬리빛처럼 곱진 않아도 노지에서 자란 참외라 살이 아삭아삭하고 속이 단물이 많아 시원하기가 어느 이름난 상표를 단 참외를 무시하게 한다. 고추밭 고랑은 손가락만한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제대로 묶어주지 못한 잔가지는 무게에 못이겨 설해목처럼 가지가 찢겨 있었다. 토마토도 어른키만큼 자라 무거워진 열매에 짖눌려 긴 허릴 꺾고 서 있어 지줏대에 다시 묶어 주어야 했다. 아무리 마트의 신선코너에 포장 잘 된 토마토도 우리 밭에서 따 먹는 토마토처럼 살이 부드럽고 고소하지가 않았다. 여름이면 늘 이 텃밭의 야채를 먹어 본 아이들도 이젠 할머니가 키운 농작물의 특별한 맛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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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맛을 본 생생한 녹색식물을 보면 내 눈이 푸르러지고 내 몸이 신선해진다. 붉어진 토마토를 쓱쓱 옷에 문질러 먹으며 고랑을 나서니 가장 늦게 모종을 한 들깨가 이제 한창 물이 올라 손바닥만해진 짙푸른 깻잎의 향이 밭머리에 그득하다. 입에서 군침이 돈다. 저 싱싱한 깻잎을 차곡차곡 양념에 재서 간간하게 찌면 그것 하나로도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울 것 같았다. 깻잎과는 잊혀지지 않는 오랜 인연이 있다. 훈련을 마치고 복더위에 최전방에 배치를 받아 낮엔 호를 파는 작업을 하느라 잠시 야전생활을 했다. 한낮 허기진 졸병인 나는 마른 건빵과 막걸리를 먹고 체하고 말았다. 사나흘 땡볕의 비닐 하우스 안에서 배를 움켜쥐고 먹지도 못하고 뒹구르다 겨우 면회 나간 사람이 사다 준 약을 먹고 일어 났으나 그만 입맛을 잃었다. 그런데 아침 구보길에 나섰던 소대원들이 따 온 깻잎을 된장에 찍어 먹으며 그 깻잎향으로 입맛을 찾았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눈물나게 그 깻잎향이 입안에 박하향처럼 퍼져가고 있었다.

금방 나는 깻잎을 따러 오라고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가까운 이웃과 아내가 해저녁 깻잎을 따고 난 호박잎부터 가지, 오이, 고추, 애호박, 토마토등 주섬주섬 먹거릴 챙겼다. 시장에 가면 널려 있을 그 푸성귀지만 밭에서 거두며 나누는 정은 특별하다. 비록 어머님은 늘 농사일에 시달려 내게 기억날 만한 입맛을 전해주시지 않았지만 대신 아직도 이렇게 풍성하고 건강한 식탁을 텃밭에 마련해 주셔서 난 가만히 앉아 신선한 여름의 미각을 즐기며 덤으로 친한 이웃에까지 인심을 쓰게 하셨다. 어느 새 먼 세대차를 느끼는 아이들마져 이 토종의 미각에 길들여져 된장찌게에 씨레기 나물,비름나물,미나리,호박쌈,깻잎에 오이생채같은 잊혀져 가는 우리의 미각을 즐기는 것을 보면 참 대견하고 이쁘다. 여름은 이 청정한 야채와 풀향기로 나는 푸른 식물성이 되어간다.


2003.7.22일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