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가면
여름내내 먼지 낀 삼층 창틀 틈에서 개망초 세 뿌리가 자라는 걸 보았다 어디선가 날아와 샷시 창틈에서 돋아난 개망초도 엊그제로 그 명을 다하고 말라간다 일년초 식물이 한 여름동안 땅도 아닌 창틈에서 꿋꿋하게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날마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안타까운 눈길을 주며 날 바라보듯 했다 무릎 관절이 시큰대는 오르내림의 버거움에서 창틀에 핀 흰 개망초꽃은 가까운 친구였다 그 창틀 너머 재개발 예정으로 큰 운동장만하게 밀어놓은 공터에 깊고 넓은 웅덩이가 파져 있었다 몇 개의 공장터를 밀어놓은 넓은 웅덩이에 서너번 폭우가 쏟아져 작은 호수처럼 물이 고여 있어 담넘어 찰랑이는 웅덩이를 내다 볼 적마다 퍼덕거리는 메기나 잉어의 용트림을 상상했다 그리고 한 여름 물이 말라 바닥을 드러낸 가문 날 이 삭막한 도심의 공단 안에 갇힌 나는 숨 쉴 수 없는 답답함에 아가미를 벌떡거리는 물고기처럼 상처난 지느러미로 지쳐가고 있었다
기계실 뒷문을 나가면 작은 스레트 지붕 처마밑 빗물받이 원통 아래서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다 회색 산업단지인 이 곳은 어디라도 식물이 자랄 수 없는 시멘트바닥인데 거기 좁은 물받이 홈통 안에 흙이 고여 바람에 날아 든 오동나무 씨가 올 봄 싹을 틔웠다 넓다란 떡잎이 지고 한 두 마디 자라더니 한 여름새에 키가 일미터는 자라 의젓한 오동나무가 되었다 담장 너머 오십미터 뒷마당에서 해매다 봄이면 어미나무가 연보랏빛 오동꽃을 피우고 있더니 바람에 날린 씨앗이 흙이 있는 깨진 콘크리트 틈 새나 하수구에서 힘겨운 종족 번식을 하며 아무도 관심없는 사막같은 도심에서 그렇게 꽃을 피우고 씨를 퍼트리며 공생하고 있었다 봄부터 서너달동안 삶의 무게에 지치며 똑 같은 하루가 권태로워질적마다 나는 두 식물이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눈여겨 보며 위안을 얻었다 그렇게 나와 함께 여름을 난 주인공들이 지금 태풍의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태풍이 북상하기 전날인 어제는 맑은 하늘에 샛털 구름이 평화롭게 떠 있고 바람도 잔잔했다 순식간에 짓밟고 핥퀴고 지나갈 태풍의 위력앞에서의 고요와 적막은 보이지 않게 어깨를 짓누르고 하루를 긴장하며 사는 삶의 중압감과 같은 느낌은 아닐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경제적 위기가 마치 태풍처럼 우리 앞에서 먹구름처럼 떠 있는 듯 하다 보이지 않게 여기저기 곪고 병들어 있는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도 언제 태풍으로 변해 상처를 줄 지 모른다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이런 긴장감은 나 혼자만의 불안은 아닐거다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잘 견디고 있는데도 엄습해오는 태풍같은 불안의 진로를 바꾸고 싶다 그러나 그건 마음의 바램뿐 내가 어찌 苦聖諦의 苦에서 벗어날 수 있으랴 여름내내 좁고 척박한 틈 새에서도 평화로이 주어진 생을 사는 착한 식물의 삶을 지켜 보았다 그들처럼 나의 생도 열심히 살면서 태풍을 견디며 지금 이 곳 까지 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곧 불어닥칠 태풍의 긴장과 위기를 벗어나면 곧 가을이 올 거다
다시 망가진 것들을 추수르고 상처난 것들을 아물려야 할 시간이 올 것이다 지줏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 있는 어린 오동나무도 손바닥처럼 넓은 잎을 떨구며 나이테를 만들 것이다 살아가려는 모든 희망들이 모두 잘 견디고 일어 설 수 있는 시간이길 바램한다 지금 바깥은 들이치는 빗줄기와 세찬 바람으로 어둡다 언제부턴가 내 삶은 태풍전야처럼 긴장되어 위기의식에 빠져 있음을 느낀다 저무는 나이 탓이려니 하는 변명으로도 위안을 얻지 못하고 또 황급히 가을이 오면 어찌할까 그렇게 서러운 세월이 가면 또 다시 한숨만 깊어질 것인가 내 마음의 골짜기서 발생한 이 무거운 기압골은 언제 소멸되는 걸까 세력을 다한 태풍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하늘끝에서 가을이 오겠지 아! 선선해지는 것은 허전해지는 거릴 느낀다
2012년 8월 28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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