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끝에서
한 주 전 때 이른 초겨울같은 기습한파가 지나가더니 무서리가 내리고 가을빛이 깊어간다
벌써 들판은 칙칙한 갈빛으로 가라앉고 가을걷이를 마친 벌판은 텅빈 가슴을 드러낸다 무서리에 시들은 푸성귀들 사이에서 유독 무 배추밭은 제철을 만난듯 푸르름이 한여름이다 문득 시퍼런 무우청을 보자 가슴속에서 퍼렇게 속차오르는 식욕을 느낀다 통통한 가을무로 담근 새빨간 깍두기와 윤기 자르르한 하얀 햅쌀밥 생각에 입맛이 돈다 가을 벌판을 바라보니 늦가을 추수철에 샛참이나 들밥을 먹던 맛난 기억들이 싱싱한 무생채처럼 빨갛게 버무려저 추억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어디 그뿐이랴, 햅쌀에 서리태같은 늦은 논두렁콩이나 알록달록한 넝쿨콩을 까서 넣으면 밤처럼 달고 고소한 찰진 햇밥맛은 반찬도 필요 없이 밥한그릇 뚝딱이다 어머닌 서리오기전에 거둔 햇팥밥을 하시는 날엔 유난히 잡곡을 좋아하는 내 밥에 그 파삭한 붉은 팥을 고봉으로 소복한 고명처럼 올려 주셨다 그리고 서리내린 가을 끝에서 거둔 노지에서 자란 끝물 애호박은 아주 달고 맛있다 구수한 호박된장찌개도 좋지만 새우젓을 넣은 자작한 애호박 찌개는 담백하고 달다 점점 먹고싶은 것도 없어지는 내가 이런 사라져가는 입맛을 추억하니 나도 늙는가 보다
이상기후 탓에 김치가 금치가 되는 요즘이기도 하지만 식구들이 집에서 밥 먹는 일도 드물다 그러다 보니 둘레밥상의 추억도 없어지고 더구나 올부터 작은 텃밭마져 경작을 멈추니 늘 앞밭에서 거두던 풍성하고 싱싱한 푸성귀 맛이 그립기만 하다 오랜 시골생활과 직접 농사를 지어 먹던 습관 때문인지 마트에서 산 채소는 그냥 인스탄트 음식처럼 느껴질 뿐 야채 본연의 거칠고 풋풋한 녹색미각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선가 초록의 푸릇한 채소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텃밭을 지나다 보면 농사 참 잘졌구나 하면서 농부의 정성과 사랑이 느껴져 푸르른 밭고랑을 자꾸 뒤돌아 본다 팔십 평생을 당신의 피땀으로 농사를 지으시며 무엇이든 거둬먹이시던 어머니가 이젠 기력도 쇠해 아무것도 경작한 것이 없는 올 가을마당은 얼마나 황량할까 주일마다 가지가지 싱싱한 야채와 곡식을 챙겨 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은 여전해 지금 아무것도 주실게 없는데도 뭐 가져 갈 것 없냐 하시며 빈 손인 것을 미안해 하신다 아마도 그런 어머니 마음이 지금 우리가 생각나는 추억의 입맛이고 어머니의 손맛일게다
이제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을 준비하는 갈무리의 시간인 십일월이다 추수는 무엇으로도 그 가치를 비교할 수 없는 농부의 행복이고 보람이다 마음에 차오르는 뿌듯함과 자연이 준 결실에 대견해하고 고마워하는 감사의 마음과 이런 부자같은 마음의 행복을 오직 농부에게만 느끼게 해주는 게 가을이고 추수의 기쁨이다 하지만 해마다 나는 마음밭을 일구는 자연과 멀어지니 잃어가는 입맛처럼 일상이 삭막해진다
그래선가 근래에 들어서 부쩍 시름시름 가을앓이가 도지면서 들판을 나서고 싶다 추수끝에서 오는 구수한 검불냄새와 결실의 낱알 냄새와 진한 훍냄새을 가까이 하고 싶다
가을 끝, 잃어버린 젊음속에서 와삭와삭 소처럼 청청한 푸성귀의 계절을 되새김하고 싶다
2010년 11월 2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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