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가면서 내 삶의 중심을 본다는 것은 늘 부담스러워
슬며시 비껴서서 에돌거나 쓸쓸한 변방을 기웃거리는
서성거림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거리를 두고 변두리를 도는 것은
혹시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쩌면 일종의 도피성적 일탈이
원심력처럼 작용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게서 괘도 이탈을 향한 방랑과 쓸쓸한 자유는
그렇게 삶의 언저리를 벗어나서
다시 안쪽을 바라보는 회귀본능으로 시들어 버려
해질무렵이면 발길을 돌리곤 했지만
그러한 반복의 시간들이 겹겹으로 쌓이면서
이젠 삶의 중심에서조차 멀리 벗어나 있는 것 같다
작년 여름부터 지친 일상의 답답함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사나흘 홀로 길을 떠났다
많은 사람들이 해안을 따라 멀리 외곽으로 벗어나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깊숙한 내륙으로 향한다
어느 책에서 보니 산은 영원한 母音이라 했던가
한여름 산중에 들면 마음이 아늑하고 적막해진다
소나기가 오가는 날 길을 떠난 노령산맥의 계곡은
쇄골사이를 지나는 골짜기처럼 좁고 가파르며 한적하다
그래선가 내륙을 가로지르는 골짜기 길은
내밀하고 깊은 외로움과 고독속을 헤쳐가듯 고요로웠다
산굽이를 돌적마다
허파같은 내륙의 호수를 향해 불어가는
청정한 산바람의 초록은 농밀하고 맑고 향기롭다
가도가도 벗어날 수 없는 여름의 짙은 초록은 끝이 없고
간간히 쏟아지는 단발성 소나기는
계곡을 돌때마다 신비로운 운무를 만들며
여름의 풍만한 가슴을 가리곤 했다
일년만에 다시 찾은 山家는 작년보다 더 수척해지고
홀로 손이 딸려 미처 돌보지 못한 田莊은 늙어만 갔다
여름은 풀과의 전쟁이라 잠시 손을 놓고 방심하면
마치 폐사지처럼 녹음방초는 황폐해져 가는 게 시골살이다
사방이 꽃밭이던 봄이 지나고
우후죽순 자라는 여름잡초는 대충 접어도
돌아서면 다시 무성해진 풀밭이 되고 마니
풀과의 전쟁에서 백기를 들고
사람도 잡초가 되어 자연속에 사는 게
오히려 불편할 것도 없는 듯 싶다
작년에 달콤하고 탐스럽게 열려있던 수밀도의 과수원은
주인장이 돌볼 수 없어 올해는 버려두었더니
솎아내지 못한 아기 조막만한 복숭아들이
마치 다닥다닥 매달린 꽃처럼 발그레하게 익었다
그야말로 상품성 없이 작긴해도
청정한 자연속에서 야생으로 익은 무공해 과일인 셈인데
그나마 사람손이 미치지 못하는 산비탈에 있어
밤이면 멧돼지가 내려와 맛나게 포식을 하고 간다고 한다
더위도 식힐 겸
달뜨는 강변에서 천렵을 계획했으나
소나기가 오가기에 포기했는데
저녁이 지나자 기습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양동이로 퍼븟듯 잠시 쏟아진 폭우에
휩쓸려 내려가는 계곡 물소리가
마을이 떠내려 갈 것처럼 요란하다
산을 흔드는 물소리에 놀라
주섬주섬 후레쉬를 들고 밖을 나서니
휩쓸린 흙탕물이 작은 다리 위로 넘쳐 흐르고
시뻘겋게 아우성치며 몰려오는 무서운 급류는
작은 소로를 넘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 있어도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울려오는 계곡의 물소리가
마음의 골짜기를 휩쓸고 간다
비가 와선가 작년에 달빛속에 울던 노루 울음 소리도
밤 새 울던 소쩍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도심속 소음에 둔탁해졌던 청각이
시골에 오면 토끼처럼 예민해지고
별을 바라볼 수 있게 눈빛도 맑아진다
서울서 멀어진 만큼 자연속에 있다보면 욕심이 없어지고
무겁게 짓눌렸던 시름도 잠시 내려놓게 된다
비로소 내가 비워둔 마음속의 내륙에 들어온 듯
산으로 둘러 싼 작은 분지가 고향처럼 아늑하게 여겨진다
나도 늙어가는지 자꾸 마음은 도심에서 멀어져
향수에 젖고 발길은 한적한 시골로 향한다
하지만 자유로이 떠나기엔 아직 구속된 것이 많고
성장하는 자식에게 발목이 잡혀 꼼작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시골로 내려가는 게 팔자 고칠 일도 아니고
생각처럼 시골살이가 낭만적이고 목가적이지도 않다
다만 나이들어 찾아 오는 외로움과 고독감
그리고 손을 놓고 있는 무기력감을 덜고자
흙을 밟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태생이 농사꾼 자식이라선가
젊은 날엔 시골이 지겨워 벗어나 살았어도
지금은 흙을 밟고 흙을 만질때가 정겹다
어쩌면 사는 것은 끝없이 내 안에 어떠한 생명력을 키우고
그 과정에서 같이 공유하고 이루어 가는 작은 보람이 아닌가 싶다
삭막한 일상의 반복이 아니라
날마다 조금씩 변화하는 자연의 소소한 것들의 바라봄 속에서
우리의 빈 가슴은 허하지 않을 듯 싶다
풍류를 따라 花開산방이나 水流산방은 짓지 못하더라도
작은 자연을 벗할 수 있는 少笑산방이면 족하지 않을까
봄이면 희망의 씨앗을 뿌리고
메마른 가슴에 돋아난 싹을 보며
욕심의 풀을 뽑고 한 철 한 철 견뎌낸 열매를 보고
다시 새 봄을 약속해 다음해에 경작할 종자를 갈무리하며
겨울을 나는 순환의 순리를 사는 소소한 행복을 그리며
이 가을이 저물면 여름이 여물어 간 꽃씨를 받아드는
작은 기쁨을 마음으로나마 그려본다
그러나 자주 탈이 나는 내 육신이
이제 그런 자연속에서 삶의 텃밭을 가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젠 밖으로 에돌던 마음길도 안으로 터를 잡아
소리없이 피고지는 들꽃처럼 살고 싶어진다
비 그친 아침 산책길에 보니
봄 지나 잎을 버린 살빛 상사화꽃이 우물가에 은근하다
푸른 날개를 버린 내 삶도
상사화처럼 꽃대를 올릴 수 있을지 하는 허한 마음이
잎 진 빈자리에서 살빛 꽃그림자로 머문다
비 바람에 떨어진 살구를 차마 밟을 수 없어
자꾸 가던 길을 멈춘다
2010년 8월 23일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