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에서 오솔길까지 그 해 마지막 겨울방학의 고독 먼 숲 2009. 12. 10. 00:07 동지가 지난 추운 겨울방학엔 낮이면 동산에 올라 나무 한짐을 해오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건너방에 군불을 때는 일이 중요한 일과였다 땔감으로 좋은 마른 억새나 낙엽은 겨울이 오기전에 나무꾼이나 산 주인 차지가 되고 그 때는 우리 땅이라곤 한평도 없던 가난한 시골살이라 나는 나무도둑이 되어 몰래 동태처럼 언 청솔가지를 가지치기해 무거운 나뭇짐을 어깨에 메고 왔다 아궁이 깊숙히 언 청솔가지를 꾸역꾸역 쳐넣고 마른 솔가지에 성냥불을 붙여 놓으면 마치 불꽃놀이를 하듯 타다닥 소리를 내며 푸른 솔잎이 타 들어가기 시작했다송진이 흐르는 젖은 나무가 타기 시작하면 여우잡는 듯 매운 연기가 낮은 울타리를 맴돌고 둥근 굴둑에서는 화력발전소처럼 힘차게 하얀 연기가 솟아 올랐다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며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고 나면 어둑하니 밤이 찾아와 뒷산 참나무 가지사이로 허연 달이 떠오르고 부엉이가 울기 시작했다 뒤돌아 보면 앙상한 뼈만 남은 겨울숲은 칠흙처럼 어두워 유령의 숲같이 으시시했다 해가 짧은 동짓달이라 농사를 짓던 시골은 저녁을 먹고 나면 금방 밤이 이슥해졌다 나는 뒷방으로 건너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천장의 냉기와 아랫목이 따끈해져 올 때까지 톨스토이의『부활』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죄와벌』같은 러시아 소설을 읽었다 그 시절은 공산주의라는 붉은 이데올로기는 곁눈질도 못하는 암울한 냉전시대여서 혁명이란 말조차 조심스럽고 러시아 소설마져 불온서적처럼 느껴지던 때였다그러나 나는 음울하고 무거운 러시아 소설을 읽으며 페치카가 있는 양탄자의 방이나 시베리아의 설경을 상상하기도 하고 시큼하고 딱딱한 굳은 빵을 생각하며 내가 라스콜리니코프가 되거나 카츄사를 찾아 눈물 흘리며 아득한 눈길을 떠나는 상상을 했다 때론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으며 자랑스런 혁명전사가 되기도 하였다러시아 소설은 아무리 읽어도 외워지지않는 이름들의 철자들이 어렵고 낯설어 밤하늘에 삐죽삐죽 뻣친 나목의 잔가지처럼 느껴졌고 무겁고 우울했지만 어린 나이에 자세히 내용도 모른 채 겉멋처럼 금서를 읽듯 어둠속에서 소설을 읽었다 한겨울의 햇살은 낮은 처마에 걸터앉아 밤 새 언 고드름의 눈물이나 짜내고 있었다 시골에선 겨울방학은 바쁜 여름과 달리 한가로워 정오가 지나 불기가 식는 한낮에는 사그라드는 화롯불을 끌어 앉고 찌직거리는 라디오를 들으며 펜팔편지를 쓰거나 우체국을 드나들며 보름치씩 되는 엽서 희망곡을 방송국마다 보내느라 바빴다그 때도 나는 차이코프스키,라프마니노프,림스키콜사코프,무소르그스키같은 음울하고 비감한 음악을 좋아했으니 알게 모르게 러시아 예술을 동경했던 것 같다 한창 밝고 푸른 나이인데도 드볼작같은 어두운 단조의 선율이나 悲歌처럼 마음을 적시는 슬픈 음악을 들으며 고립에 빠졌던 성장기의 내 안은 무척 어두웠다 그래선가 때론 슬픔이 눈처럼 희고 순결하다고 느껴졌고 알 수 없는 그리움처럼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아련한 동경은 화롯불의 빨간 불씨처럼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꽃같던 열아홉살의 마지막 겨울방학은 자유를 억압당한 채 어둠속에서 살면서 새로운 혁명과 자유를 갈구하던 공산치하의 인텔리겐차들처럼 푸른 꿈을 접은 채 암울한 현실속에서 절망과 비애를 안고 살았다 길지 않은 시간이였지만 희망을 상실한 날들은 마치 수용소의 하루처럼 무기력했다 한겨울을 러시아 소설속의 주인공인 닥터 지바고나 라스콜리니코프가 되어 외풍의 냉기에 어깨가 시린 춥고 어둔 골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회색의 긴 겨울이 지나고 희망의 봄이 오기를 꿈꾸며 스스로 아픔을 치유하고 있었다 멍든 스무살의 가슴속에 흐르는 뜨거운 내 심장의 박동의 소리를 들으며 결빙의 겨울강이 되어 홀로 외롭고 고독했던 계절을 견디고 있던 그 시절 접근할 수 없었던 내 마음의 절벽엔 선혈처럼 붉은 동백꽃이 피어 있었을것이다 이제 먼 세월을 지나고 나니 살을 에이는듯했던 젊음의 아픔이 꽃잎처럼 아름답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겨울방학이 온다면 나는 단단한 고치를 틀고 칩거하다 새 봄이면 세월의 허물을 벗고 또 다시 꽃 필 수 있는 새싹이 되고 싶다 2001년 12.11일. 추억의 오솔길에서,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