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속을 걸어 오며
안개속을 걸어 오며
여직 나를 감추고 살만큼 살아온 길이 부끄럽지 않았거늘
사는 게 늘 안개 속 같아 떠도는 부유물처럼 뿌리내리지 못했던 내 삶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내 무게로도 벅차 늘 예민해 하는 나를 지켜봐 주고 사는 건 안개속을 벗어나 적나라한 알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관계이거늘
전조등 없이도 더듬더듬 안개 속을 나올 수 있는데 그것은 아직 사슴처럼 맑은 눈의 아이들의 눈빛이
그렇게 아이들을 맑고 향기로운 꽃처럼 키워 준 당신에게 늦은 여정의 동반자로서 세상 눈에 어둔 부족한 내가
2001.11.23일. 당신의 생일을 축하하며
■ 오래된 글을 정리하다가 새로운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 본다 올해는 윤달이 있어선지 늦어져 엊그제가 아내의 생일이였다 겨우 네 식구인데도 한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아 미리 조촐하게 생일 축하를 하였지만 갈수록 맞이하는 생일이 허전하고 흐르는 세월이 두렵다 갱년기를 맞는 우리 부부는 작년부터 쌓인 심신의 피로로 많이 힘들었다 모두가 휴식할 시간없이 바쁘게 매여 살다보니 조금씩 피곤이 누적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같이 대화하며 서로를 돌아 볼 여유없이 살다보니 무관심하지 않으면서도 속으론 미움이 쌓일만큼 벽이 생기는 것 같았다 부부간에도 사소한 것, 늘 그렇지만 그렇게 소소한 감정들을 풀지 못하고 쌓아가면서 서로 기대며 보듬어 주어야 할 마음들이 소원해지면서 각을 세우며 외로워져 가고 있었다
모두 남남이 만나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얇은 마음 한 장이 벽을 세우면 어느날 서로 남남처럼 등을 보이는 것 같아 참 쉽게 위태로워 지는 것 같았다 어느덧 서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느끼는 외로움에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소통되지 않는 사이엔 오랫동안 같이 산 세월마져 물거품처럼 꺼져 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 그런 허망한 생각이 들기도 했으니 참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게 어렵다는 걸 느꼈다 아무리 값지고 귀중한 그릇이라도 작은 상처가 나고 금이 가면 쉬이 깨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모든 사람의 인연이 그렇지만 부부라는 인연도 그렇게 조심스런 그릇같아서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 안에서 삭혀지는 세월과 사랑도 달라질 것 같다 이 글을 다시 읽으며 남은 세월은 그저 단단하고 투박한 질그릇처럼 둥글어져서 오래도록 손때 묻은 골동품이 되어 내 아이들이 물려 받았으면 하는 소망이다 늦게나마 아내에게 살면서 미안한 마음 전하고 새해엔 건강했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
2009.11. 27 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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