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상봉의 가을 그림
성균관 풍경 (1959)
정물 (1971) ![]() 정물 (1966) ![]() 백일홍 (1967)
국화 1973
가을은 앤티크한 계절이다
손때묻은 오래된 것들이 그립고 빛 바랜 추억이 그리운 계절이다 사라져가는 것과 잊혀진 것들이 보고싶고 생각나는 계절이다 내 안에 남아 있는 흔적과 뒤에 남는 그림자가 새삼 정겨워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이렇게 잦아드는 가을빛이 향기로워지면 호젓하게 그림을 보러 가고 싶다 고3쯤이였을까, 국전이 미술계에 대단한 힘을 발휘하던 시절 까만 교복을 입고 덕수궁미술관을 처음 갔던 기억이 새롭다 미술학도도 아니지만 그 때는 가을이 되면 어떤 그림이 대통령상을 탈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을을 기다릴만큼 국전의 그림은 미술계의 계보같았고 그 인연일까, 가끔 좋은 전시회가 있으면 그림을 보러 다녔고 멀지않은 덕수궁의 뜨락과 돌담길은 혼자 심심치 않은 산책코스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가을이면 그 당시 국전에서 이름을 날리던 이인성, 손응성, 천경자, 장우성 화백같은 근대화가들의 그림이 생각나곤 했는데 우연히 인터넷상에서 도상봉화백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제자인 도상봉은 한국 서양화 1세대다
오랫만에 보는 그의 그림은 서양식 표현이 어색할지 모르지만 참 클래식하면서 앤티크하다 내 생각에 고전적이다는 것은 기본과 근본에 충실한 아름다움에서 오는 마치 고고한 명품처럼 변하지 않는 오래된 향기라고 생각한다 그의 정물화는 수직, 수평의 안정적인 구도가 보는 사람에게 편안하고 평화롭게 한다 정물의 부드러운 필치와 밝은 색조는 그림을 온화하고 따스하게 느끼게 하며 그가 사랑한 백자나 달항아리는 꽃과 정물과 어울려 격조높고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그렸다 비원이나 성균관, 창덕궁같은 호젓하고 고요로운 고궁을 그린 풍경화는 고풍스럽고 정적이여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혀 준다 풍경화의 색조는 우리의 황토같이 질박하고도 부드러울 뿐 아니라 정물화에선 꽃의 원색조차도 햇볕에 농익은 자연의 빛깔같이 탁하지 않아 경박하지 않고 무겁지 않으며 밝고 화사하며 순박하다 그의 그림들은 우리의 오래된 숨결과 소박한 손길이 배어난 품위있는 골동품처럼 욕심을 비운 청빈한 마음과 관조의 시각으로 편안히 바라보고 싶어진다 그렇게 도상봉의 그림을 보노라면 스타벅스같은 오픈된 커피집보다는 미술관이 가까운 정동이나 인사동을 돌며 그림을 보다가 북촌마을의 작은 찻집이나 북카페 같은 곳에서 가을햇살처럼 고요롭고 나즈막하게 차를 마시고 싶어진다 좀 여유가 있다면 호젓하게 부암동 산자락에 있는 환기미술관에 들러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산을 마주하며 상념에 젖어 보는 것도 좋으리라 돌아나오는 길엔 자하문쯤에 있는 에스프레소 카페에 들러 침전된 가을의 암갈색 커피향기에 취해보고도 싶다 그림속에서의 풍경과 사물의 영혼은 그림을 그린 화가의 영혼이며 우리가 그림을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새로운 내면을 찾는 여행일것이다 세월이 가면서 더욱 빛나고 그윽해지는 그림속의 영혼을 보면서 쓸쓸한 모습으로 돌아갈 나의 흔적도 추억해 본다 그러나 내가 남길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래서일까 내 그림자마져 거두어 돌아가고 싶은 가을은 더욱 고독해진다
가을은 현실을 벗어나 호사스럽게 멋을 내고 싶은 계절이다 낭만이나 자유라는 이름으로 클래식하고 앤티크한 분위기에 젖어 지금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모습의 나를 연출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밝은 조명을 벗어난 배우처럼 고독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배회하고 싶어진다 홀로 가슴으로 저려오는 진한 페이소스를 즐기면서 햇살 고운 공원의 벤치에 앉아 느릿하게 담배라도 피워보고 싶다 천천히 물들어오는 단풍들이 내 심장처럼 붉어지는 날 가을은 또 다시 소리없는 이별을 준비하리라 이 가을 나의 빈 캔버스는 어떤 가을을 그리고 싶은 걸까?
2009.9.20일 먼 숲
코스모스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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