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숲 2009. 8. 26. 11:47

   

 

 

 

 

  

 

 

 

 

     

 

 

 

 

 휴가를 맞아서 일상의 번잡함과 무거운 삶의 무게를 모르는 척 내려놓고 옆에 누가 있기만 해도 끈적거릴 것 같은 복더위 속에 주인 내외분께 염치 불구하고 한달여만에 다시 내 마음의 뜰을 찾듯 고요롭고 정겨운 시골로 내려갔다. 그렇게 바람처럼 구름가듯 뜬금없이 찾아간 마을은 십여년 넘게 가꾸고 길러온 꽃과 나무들이 집 둘레를 울처럼 둘러치며 자연스레 뿌리를 내려 눈길 닿는 곳마다 정답고 소박한 미소를 보낸다. 개발이란 변화없이 오랫동안 터를 잡은 시골이라면 구태여 꽃밭이나 동산을 구별치 않아도 자연스레 마을 전체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오손도손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꽃밭이고 마음의 고향같아 낯설지는 않지만 그래도 찾을적마다 밀집모자를 쓰고 땀내나는 수건을 걸친 채 흙투성이 손으로 반기는 투박한 인정이 있어야 객이라도 접시꽃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아닐까. 불쑥 찾아간 내게 늘 봉숭아 꽃물같은 다정하고 고운 마음으로 "어서 와" 하는 주인장의 푸근한 인사가 긴장과 지친 마음의 피로를 풀어주고 안온하게 한다

 

근 한달을 꿈결처럼 그리워하다 내려간 시골은 주인장이 몇년 전 큰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해 십여년간 가꿔 온 아름다운 뜨락을 방치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오래 전 정성으로 심고 기른 꽃과 나무들이 제 자리를 잡아 철철히 꽃을 피우며 서늘한 나무 그늘을 만들고 있다. 아직 몸이 불편한 주인장의 사정으로 봄이면 파종해야 할 화려한 여름꽃들이 적어 장마가 끝난 뜨락은 조용하지만 운치있는 장독대를 배경으로 살빛 상사화와 흰 봉숭아가 곱다. 그곳은 아침이면 산안개가 깨끗하게 마을을  세수하며 골짜기를 오르고 밤이면 먼 개 짖는 소리와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 소리가 오랫동안 잠자던 유년의 기억을 깨운다. 이렇게 자연을 벗삼고 자연속에 동화 되어 사는 여유는 모두 다 누릴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이렇게 풍성한 자연속에 살기 위해 많은 것을 잃어 버리거나 내려놓고 포기하며 적응하는 노력으로 터를 잡았을 것이다. 많은 것을 비운 욕심없는 마음의 평정이 있어야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될 것이다. 자연의 순리에 눈맞추고 귀 기울일 때 오는 교감은 내가 땀 흘려 가꾸고 돌보며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순수한 메아리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농사일로 성장한 나는 시골살이가 막연한 낭만과 목가적인 서정은 아닌 것을 안다. 그러나 오래전 도심생활로 바뀐 후론 경제적 목적을 위해 경작하는 논밭과는 다르게 내가 가꾸고 돌보는 텃밭이나 뜰이 있다면 하는 바램을 안고 살았다. 대부분 사람들이 꿈꾸는 그러한 생활 터전은 내 마음을 가꾸고 조율할 수 있는 여백이고 반추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자연을 가꾸는 일은 생명의 소중함을 알아 해마다 씨 뿌리고 돌보는 자연과의 교감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내일을 꿈꾸는 일일 것이다. 비가 그친 오후 주인 내외랑 다래알이 굵어가는 덩굴 그늘에서 농익은 복숭아와 갓 튀겨낸 두릅꽃의 향기를 맛보며 그동안의 간간한 고생담을 듣기도 하고, 태산목이 푸른 궁륭울 이룬 정원을 청소하다 비오듯 땀이 흐르면 계곡에 들어 신선처럼 찬물에 등목을 하는 한가로운 시간이 금새 지나갔다. 사람살이는 어디나 별반 다르지 않지만 사나흘 있어 보니 지금 노령화된 시골은 적막하다. 이러한 시골일수록 고립과 소외는 사람을 더욱 고독하게 할 수 있어 이웃간에 더욱 마음을 열고 정겹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숲을 이루며 사는 자연처럼 오랫만에 이곳에 와서 이웃간끼리 오가는 시골의 인정을 느끼다 보니 오래전 집성촌을 이루고 실던 옛시절의 푸근한 내 고향이 그리워진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 오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답답한 아파트를 벗어나 혼자 밖을 나섰다가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 『 힐링가든』이란 책을 보게 되었다. 마음을 치유한다는 힐링가든(HEALING GARDEN) 은 제주에 사시는 저자가 남편과 사별한 후 절망적인 아픔에서 오랫동안 뜰을 가꾸며 마음을 치유한 아름다운 정원을 소개한 책이다. 미국에 유명한 "타샤의 정원"이 있다면 우리나라엔 제주의 "힐링가든"이 있지 않나 싶게 저자는 자연과의 교감에서 많은 배움을 전한다. 십여년 넘게 혼자 제주의 비바람속에서 은은하고 아름다운 우리 야생화와 나무를 심고 키우며 넉넉하고 기품있는 정원을 만들기까지 많은 고생과 땀으로 일구었으리라. 그렇게 식물을 사랑하고 심고 가꾸는 과정에서 저자는 자연과 대화하며 교감하는 사이 아픔을 치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마음에 혼자만의 상처나 아픔을 간직하며 치유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꽃 한 포기 심을 수 있는 터를 가지고 있지 못할지라도 마음속에 나만의 정원을 만들어 사랑의 씨앗을 심고 키우며 꽃을 피운다면 그 또한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힐링가든이 될거라 생각한다. 치유한다는 건 뿌리를 내리고 홀로 설 수 있는 희망일것이다. 고향은 늘 마음에 있지만 흙을 밟고 살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와 삭막한 현실을 살면서 내 안에 작은 뜨락을 만들고 꽃과 나무를 심고 새 우는 소리를 듣는다면 자신만의 무릉도원이 아니겠는가.  

 

다시 바쁜 일상에 시달리다 보니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고 모처럼 쓰는 글은 두서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속에 부대끼며 사는 일이 점점 꾀가 나고 일탈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지친 마음을 고향처럼 쉬어 가도록 정겨운 진대골 뜨락을 내어 주시는 주인 내외분께 늦게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늘 청안하시길 바램해 본다. 처서가 지나자 조석으로 바람이 선선하고 아침 이슬이 청명하다. 지나치며 보는 달개비꽃도 그 푸름이 더 짙다. 아무리 곤곤한 세상살이래도 어김없이 절기는 찾아와 가을을 알린다. 아! 가을인가 하며 올려다 보는 하늘엔 새털구름이 가득해 마치 잔잔한 물결이 이는 호수같다. 문득 진대골의 아름다운 호수가 그립다. 아침에 일어나 달맞이 꽃이 흐드러진 호숫가를 산책하며 물속에 잠긴 유년의 시간들을 들여다 보았다. 댐 공사로 생긴 이 호수엔 많은 수몰지구 사람들의 이야기가 물속에 잠겨 있다. 우리가 살아 온 기억들도 사라진 내 고향도 그렇게 호수에 잠겨 깊은 잠을 자고 있을지 모른다. 가을이 깊어가고 또 마음이 바람처럼 일어 떠나고 싶어지면 다시 고요로운 진대골을 찾을 것 같다. 염치없지만 그곳은 내 마음속의 이니스프리이고 힐링가든이기도 하다.

 

  

2009 8월 25일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