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배령으로 전하는 편지
곰배령으로 전하는 편지 곰배령 1100고지에서 꽃소식을 전하려 손전화를 여니 통화권 이탈지역이라는 문자가 바깥세상을 차단한다 그랬어야 했다 그렇게 세속의 모든 사람들에게 금줄을 치고 어지러운 세상의 발자욱을 막았어야 했다 곰배령은 천상으로 이어지는 하늘 꽃밭이기에 굽이굽이 산을 넘는 구름과 바람 굽이굽이 골을 넘는 안개와 비와 산그늘과 산새만이 지나가게 해야 했다 층층으로 풀과 꽃과 나무가 숲을 이루고 순한 산짐승과 물소리가 길을 내는 그곳은 잉카제국의 마추피추처럼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화원이어야 했다 삼월 꽃샘바람에 저버린 아리아리한 봄꽃을 곰배령,초여름 신록의 언덕에서 조우한다 내가 키를 낮추고 마음을 열어야 볼 수 있는 작은 꽃들이 물소리따라 오솔길따라 계곡 산비탈에 지천이다 초여름 속세의 들판엔 노란 애기똥풀이 지천인데 산바람 서늘한 오월의 곰배령 산속엔 봄처럼 피나물꽃, 동의나물꽃이 샛노랗다 삼월, 해빙의 숨소리처럼 피던 보라빛 현호색과 얼레지와 하얀 바람꽃이 유록의 숲속에서 초여름을 희롱한다 이렇게 남에서 서로 반달곰처럼 볼록한 곰배령의 능선은 햇빛의 길을 열어 꽃을 피게 하고 골골이 노래하며 흐르는 달디단 옥수는 꽃과 나무에게 목을 축이게 한다 내마음의 오지인 곰배령도 비밀의 숲처럼 오지로 남았어야 했다 애당초 너와의 경계, 나와의 경계는 길에서 만나 꽃으로 웃을 뿐 너를 안고 마음에 소유하려는 건 아니였다 잃어버린 꽃피는 삼월을 오월의 숲에서 조우하는 건 꿈이여야 했다 소식도 없이 불쑥 내가 너를 찾아간 날 초여름 고지에서 진 산벚의 꽃잎이 꿈의 편린처럼 산길에 떨어져 짓밟히고 아직 수줍게 피거나 이르게 씨를 맺은 얼레지 꽃이 산나물로 전락되어 순정을 빼앗기듯 무참하게 산객의 손에 머리채를 뽑히기도 했다 나도 그 길을 가면서 너를 지켜주지 못했다 조용조용 걸으며 너의 조붓한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다 느릿하게 걸으며 네게 반갑다고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바쁘게 사는 찌뿌린 얼굴로 무거운 발소리만 남겼을 뿐 너의 향긋한 미소를 보아주지 못했다 미안하다, 그 내밀한 오솔길을 걸으며 어리석게도 내 아픔만 생각햇을 뿐 너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하고 네 아픔을 만져주지 못했다 그저 들꽃이란 이름으로 바라보았을 뿐 무수한 너의 고운 이름을 알지 못해 불러주지 못했다 곰배령에 꽃들아 무참히 산돼지들의 주둥이에 파헤쳐지고 어지러운 사람들의 발길에 밟힐지라도 하늘로 오르는 곰배령의 길목에서 아름다운 꽃길을 만들고 뭇별들이 노니는 꽃밭이 되거라 그리고 곰배령 산정 뒷쪽에 지천으로 돋아난 은방울꽃들아 조롱조롱한 너의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왔지만 이젠 메아리처럼 아련하게 마음으로 들으련다 꽃이 피면 멀리 시끄러운 통화권 밖에 사는 나에게 맑고 아름다운 은방울 소릴 들려 줄 수 있겠지 가끔은 종을 흔들어 곰배령의 꽃소식을 전해 다오 1009.5.12 일. 먼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