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편지
눈이 올 것 같은 흐린 오후 시인 기형도가 오고 갔을 것 같은 연무 짙은 안양천의 둑방길을 따라 자전거로 달린다 겨울 철새들이 꽃처럼 떠있는 풍경을 좌우로 퇴락한 갈빛 능선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초겨울을 바라보는 시선에 쓸쓸함이 적막하도록 젖어든다 며칠동안 쓸쓸함에 대하여 애써 태연한 척 하려 해도 가슴 시리게스며드는 스산함을 숨길 수 없다 숙명처럼 이러한 통증을 겪어야 하는 십일월도 저문다 가난했던 옛날처럼 삶을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을까 쌀독 그득 쌀 채워 놓고 맛난 김장에 헛간에 땔 나무 쟁여 놓으면 그 때는 한 겨울이 따뜻한 아랫목 같을 거라 생각되었다 어린 날엔 그렇게 넉넉히 월동준비를 하고 나면 한겨울이 눈 속에 파묻혀도 따스히 겨울을 날 것 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혼란스런 세상사 뉴스가 다 나와 연관 된 것 같이 걱정스럽고 알 수 없는 근심이 찬바람처럼 세월의 문풍지로 새어 들어 와 마음이 춥다 눈과 귀를 막고 살 수 없이 사방팔방으로 열린 세상이 오히려 고립되어 단절된 아주 작은 마을의 행복을 저해하는 것 같다 사는 게 모두 그러하다고, 근심도 병이려니 지나치려 해도 마음 밖애서 흔들리는 저 작은 낙엽들 같은 불안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고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누군들 그 굴레를 피해 갈 수 있을까만 요즘엔 공연히 외로워진다 그래선가, 이 맘때쯤이면 마음속에 가두었던 외로움에 지쳐 바람처럼 불쑥 전화를 하던 도깨비같은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중국에서 사업하느라 바쁘다고 국제전화를 한 지 두 해가 지났는데도 여직 실종된 사람처럼 감감 무소식이다 오래된 전화번호부를 뒤져 불통일 줄 알면서도 그의 번호를 누른다 종적을 알 수 없는 막막함에 오래된 수첩을 뒤적이다 문득 이십년 전 타지에서 서너해 같이 일하던 선배 이름이 있어 열두번은 바뀌었을 지나간 세월의 전화 번호도 눌러 본다 예상대로 틀린 번호라며 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받는다 해묵은 수첩속의 이름들이 마치 엊그제처럼 가깝게 느껴져서 세월을 잊은 채 옛날처럼 그리운 얼굴을 떠올려 본다 살면서 꽤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했다 생각했는데 지금 이 순간 안부를 묻고 연락하는 사람들은 몇 안되다니 허무하다 오십년 세월을 혼자 사막을 걸어온 듯 쓸쓸하고 세상을 헛 산 것 같다 이제 서서히 고립의 움막을 짓고 홀로 견디는 연습을 해야 할 시간 종내 내가 하고픈 속엣말을 홀로 되뇌이며 독백처럼 묻어두지만 희미한 기억속의 잊혀지지 않은 인연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마지막 남은 잎새처럼 기억에서 흔들리는 얼굴들이 흐린 초겨울의 하늘가에서 가물거리고 종종 쓸쓸해지는 이별의 계절이 깊어간다 모두 건강하기를 얼마 남지 않은 낙엽 위에 안부 편지를 쓴다
2008.11.27 일. 먼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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