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를 노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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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름 사이로 코스모스가 거의 다 져가고 있다 . 코스모스는 꽃이 진다는 표현보단 꽃이 여물어 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꽃잎이 마르면서 씨방 가득 바늘처럼 뾰족한 꽃씨가 꽉 들어찬다.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절기엔 바람도 서늘했건만 추석을 지난 한낮은 여름날씨 같았다. 가을은 파란 하늘과, 흰구름과, 산산한 바람과,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의 곡식과,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깊어져 갔고, 언제나 길목에선 가을의 전령사처럼 코스모스는 피었다. 코스모스는 산들거리는 바람처럼 차고 맑은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 단풍이 들기까지 길게 피었는데 계절이 한 치는 빨라진 요새는 한여름부터 철 이르게 피고 지면서 조락의 시간을 재촉하는 것 같다. 추석 전 살랑거리는 가을 바람을 안고 안양천 자전거길을 달려 가다 보니 빨강과 분홍색의 코스모스가 가을 하늘 아래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해마다 보는 그 흔한 꽃이 새삼스레 저리 눈부시게 아름다웠던가 생각하며 가볍게 웃었다. 유치하도록 진한 분홍과 빨강의 꽃빛이 마른 가슴에 물들것 같이 흥건하게 젖어 오고 날씬한 꽃대의 맵씨가 바람처럼 한들거려 가볍고 경쾌해 보이기까지 한다. 파란 하늘과 흰구름과 코스모스, 이 세가지 소재만으로도 가을의 풍경화는 벅차도록 아름답다 혼자 오래된 김상희의 "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이란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렸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코스모스를 생각하면 으례히 하늘거리는 꽃숲에서 아직도 앳된 채로 남은 소녀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나이에도 코스모스는『소녀』라는 대명사처럼 인식이 되어 버렸고 내 추억의 앨범속엔 항상 감색 스커트에 흰 카라의 교복을 입은 갈래 머리이거나 단정한 단발머리의 소녀들이 코스모스처럼 청아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수줍음과 해맑음을 머금고 피는 코스모스는 아직도 내 생의 청색시대이고 아침이였다. 학교가는 가을길에서 방앗간이 있는 삼거리가 가까워 오면 윗 마을 갈래머리 소녀가 내 앞을 지나쳐 가길 바라는 두근거리는 마음에 걸음의 속도를 조절하며 앞서지 못하고 행여 그 소녀가 지나가면 조용히 뒷모습만 보며 저만큼의 거릴 두고 걸어 갔다. 코스모스처럼 가냘프고 청초한 소녀를 먼 발치서 뒤따르면서도 행여 그 소녀가 알까봐 두려워 하면서도, 한 번 쯤 뒤 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을 숨기며 코스모스 핀 시오리길을 모르는 척 시치미 떼며 코스모스가 핀 아침 길을 걸으면 마음에도 맑은 이슬이 맺혔다.
지금 생각하니 그 소녀에 대한 설레임은 그저 꽃처럼 바라볼 뿐 그리움을 앞 선 애틋한 첫사랑도 아니고 마음에 오래 담을 무거운 비밀도 아닌 분홍빛 추억이 아니였을까. 이제 그 꽃길이 모두 사라지고 추억마져 먼 세월의 뒤안길로 의미없이 지나갔는데도 아직도 코스모스를 보면 소녀들이 생각나고 나는 그 소녀들과 같이 꽃숲에 피어 있으니 열일곱 유치한 꽃분홍의 수줍음은 아직도 추억의 갈피에서 빛이 바래지 않은 것 같다. 해마다 가을이 와도 언제나 코스모스는 내 마음길에서 열일곱의 나이처럼 청초히 피어 내 기억의 가을길에서 홍안의 소년인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며칠을 코스모스 핀 길을 오가며 상념에 잠겨 꽃에 대한 시를 생각했지만 헛일이다. 마음이 일에 묶여 있고 바쁜 시간을 종종거리며 다니다 보니 이젠 아무것도 노래하지 못한다. 그래도 마음속엔 코스모스를 노래하고픈 갈망이 수없이 피고 진다. 아쉬운 마음에 코스모스를 그리워하며 여기 문태준의 시 일부를 인용해 본다.
2008.9.26 일. 먼 숲
나는 주변
- 문태준의 詩 <흔들리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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